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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난리입니다. 과거 쿠데타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확인해 봤습니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 (10·19 반란)
- 연도: 1948년
- 주모자: 김지회 (중위), 지창수 (상사) 등 남로당 계열 군인들 (여수·순천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쿠데타 종류: 군부 내 무장 반란 (지역적인 내란 사태)
- 성공/실패 여부: 실패 (정부군에 의해 진압) (한국의 반란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후의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군 내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대대적 숙청 작업(숙군)을 벌이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함 (여수·순천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란 진압 과정에서 전남 동부지역 주민 수백 명의 희생이 발생했다 (여수·순천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주요 인물들의 이후 행보: 반란을 주도한 김지회·지창수 등 관련자들은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 집행되었다 (한국의 반란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생존한 일부 가담자들은 지리산 등지에서 유격대로 활약하거나 월북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 연도: 1961년
- 주모자: 박정희 소장, 김종필 중령 등 군 장교 그룹 (한국의 반란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쿠데타 종류: 군사 쿠데타
- 성공/실패 여부: 성공 (당시 민간정부 전복) (한국의 반란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후의 영향: 민주당 정부인 장면 내각이 붕괴되고 군사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수립되어 약 3년간 군정 통치를 했다 (5·16 군사정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혁명위원회 포고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정권은 반대세력 숙청을 위한 각종 특별법을 시행하고 중앙정보부를 설치하는 등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5·16 군사정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고 이후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5·16 군사정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주요 인물들의 이후 행보: 박정희는 1963년부터 1979년 10월 암살당할 때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경제 개발과 함께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갔다. 김종필은 5·16 이후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며 정계에 입문했고, 훗날 국무총리 및 9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3김 시대의 핵심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김종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72년: 10월 유신 (헌정 쿠데타)
- 연도: 1972년
- 주모자: 박정희 대통령 (현직 국가원수에 의한 친위 쿠데타)
- 쿠데타 종류: 정치적 정변 (자기 쿠데타를 통한 헌정 질서 파괴)
- 성공/실패 여부: 성공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 체제 확립) (10월유신(十月維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후의 영향: 박정희 정권은 “10·17 비상조치”를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을 중지시키는 등 헌법 일부 효력을 정지시킨 뒤, 비상국무회의 주도로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10월유신(十月維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결과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어 **유신체제(제4공화국)**가 수립되었고, 1979년까지 사실상의 종신집권 체제가 지속되었다 (10월유신(十月維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주요 인물들의 이후 행보: 박정희는 유신체제 아래 절대권력을 누렸으나,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면서 유신 체제도 막을 내렸다 (10·26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신체제 하에서 권력을 잡았던 인사들 중 일부는 1979년 이후 등장한 신군부에 협력하였으나, 많은 인물들은 박정희 사후 정치권에서 몰락하거나 은둔하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 연도: 1979년
- 주모자: 전두환 소장, 노태우 소장 등 신군부 하나회 세력 (12·12 군사 반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쿠데타 종류: 군사 쿠데타 (군 지휘부 내 반란)
- 성공/실패 여부: 성공 (군 최고통수권을 탈취) (한국의 반란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후의 영향: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노태우 등이 대통령 최규하의 승인 없이 군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 육군 지휘부를 강제 연행함으로써 군을 장악했다 (12·12 군사 반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12·12 사건으로 사실상 박정희 사후 과도정부의 통제력이 무력화되었고, 신군부 세력이 정치적 실권을 쥐게 되었다. 이는 이듬해 5·17 쿠데타를 통한 본격적인 정권 탈취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 이행을 좌절시켰다 (12·12 군사 반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주요 인물들의 이후 행보: 전두환은 1980년 국가원수가 되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7년간 집권했고 (12·12 군사 반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노태우는 전두환의 후계자로 198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훗날 12·12 및 5·18 사건에 관한 내란 및 반란죄 등으로 기소되어 1996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역사속 오늘> 전직 대통령에게 사형이 선고된 날 | 연합뉴스), 직후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 석방되었다.
1980년: 5·17 쿠데타 (비상계엄 전국확대)
- 연도: 1980년
- 주모자: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소장 등 신군부 세력
- 쿠데타 종류: 군사 쿠데타 (계엄령을 이용한 정권 찬탈)
- 성공/실패 여부: 성공 (최규하 대통령 사임 및 신군부 집권) (한국의 반란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후의 영향: 1980년 5월 17일 자정, 신군부는 “시국 수습”을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국회를 강제로 해산했다 (5·17 쿠데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또한 학생·정치인 등 2,600여 명을 영장 없이 구금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사실상 헌정을 중단시켰다 (5·17 쿠데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러한 5·17 쿠데타에 대한 항거로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신군부는 군대를投入해 유혈 진압하였고, 그 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함에 따라 신군부 주도의 제5공화국이 출범하여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국의 반란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주요 인물들의 이후 행보: 전두환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1988년 이후 백담사 칩거 등 은둔 생활을 했으나, 민주정부 출범 후 12·12 및 5·18 관련 혐의로 노태우와 함께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등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역사속 오늘> 전직 대통령에게 사형이 선고된 날 | 연합뉴스)(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1997년 특별사면). 노태우 역시 함께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사면되었고, 두 사람은 모두 2021년에 별세하였다. 신군부 핵심 인사들도 상당수가 군 및 정계 요직을 거쳤으나, 민주화 이후에는 군사 쿠데타 세력으로서 역사적 심판을 받고 영향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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